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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9일 일요일

여자아이와 동물원의 하룻밤 -5장. 고립된 어느 여자아이.

지윤이는 결국 지하철에서 중간에 내려야 했다.
도저히 인천까지 타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윤이는 플랫폼 내의 의자에 앉아 심신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아직도 숨을 가다듬느라 여자아이의 가슴에는 여운이 이어지고 있었고, 다리 사이가 저려오고 있었다.
지윤이는 한참동안 그대로 앉아 그 날의 기억을 떨쳐내느라 노력해야 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그렇게 앉아있던 지윤이는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자 문득 고개를 들어 자신이 내린 역을 확인해 보았다.
방배역이었다.
"나.. 여기서 내렸구나..."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사당이고.. 그러면 서울대공원으로 갈 수 있고...'
무심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본래 지윤이가 가야했던 사생대회 장소는 서울대공원이었다.
그러다가 손목에 찬 시계를 봤다.
'이쯤 되었으니까.. 조금 더 기다리면.. 다시 타도 괜찮을지도 몰라...'
'그런데..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
'미리 연락도 안하고 불쑥 찾아가서 전화해도 괜찮을까..?'
지윤이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난번의 엄마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이번에도 또 아빠가 곤란해지실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미리 전화를 할까..?'
그래서 역 구내의 공중전화를 찾아보았다.
사실 지윤이에게는 지난번 일 때문에 엄마가 연락용으로 사준 휴대폰이 있었지만, 오늘 가출하면서 놓고 나왔었다.

공중전화의 수화기 너머로 신호음이 들리더니 이내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
그러나 순간 지윤이는 문득 뇌리에 스친 어떤 불안감 때문에 입을 열지 못했다.
'혹시.. 벌써 엄마가 아빠에게 전화를 했으면 어떡하지..?'
만약 그렇다면 엄마가 또 아빠에게 무슨 소리를 퍼부었을지 몰랐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지윤이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
찰칵..
지윤이는 그대로 전화를 끊고 말았다.
'만약에.. 그랬다면... 아빠는 분명히.. 엄마 걱정한다고 오지 못하게 할지도 몰라...'
'지금 내가 전화하면.. 괜히 걱정하시고는.. 하루종일 일을 못하실 지도 몰라...'
지윤이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했다.
'차라리.. 그냥 가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그리고.. 나중에... 그냥.. 아빠 퇴근하실 때 연락하는 것이...'
그렇게 생각한 지윤이는 다시 지하철을 타려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플랫폼에 서서 시계를 보니 이미 출근시간대는 지나 있었다.
'이제는 타도 좀 괜찮겠지..?'
하지만 아빠의 퇴근 때까지 남은 시간을 생각하니 막막해졌다.
저녁때까지 아빠의 집은 문이 잠겨있을 것이었다.
지윤이는 애초에 점심 때 아빠의 직장 근처로 가서 연락하려고 했었다.
아빠의 새 직장은 아직 가본 적이 없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지윤이는 아빠가 퇴근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그동안 뭐하지..?'
'지금.. 돈도 별로 없는데.. 애매한데서 돈 쓰기는 싫어..'
지갑을 열어보고는 급하게 나오느라 돈을 미리 준비 못한 자신을 책망하던 지윤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사생대회에 갈까..?'
'거기 가서.. 동물원이니까.. 시간이나 보내다가.. 오후에 인천으로 갈까..?'
'에이.. 그래 그렇게 하지 뭐.. '
지윤이는 이제 막 도착한 지하철에 올라타고 있었다.

서울대공원에 도착을 하니 이미 10시 반이 넘어있었다.
예정된 집합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은 것이다.
당연히 이미 학생들은 대공원으로 들어간 이후였고, 지윤이는 혼자 들어가서 자기 학교의 학생들을 찾아보아야 했다.
물론 그냥 혼자서 여기저기 시간만 보내도 되었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것 결석처리는 하지 말아야지' 하는 다소 학생다운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준비물도 없고.. 지각도 하고.. 엄청 깨지겠지만..."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홍학장 근처를 지나고 있을 때, 같은 학교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쪽인가 보네..'
지윤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 지윤아..."
뒤돌아보니 같은 반 미정이였다.
"어.. 찾았다.."
"찾았다는 또 뭐니..? 길이라도 잃어버린 거야..? 근데 왜 이렇게 늦었어..?"
미정이가 어이없다는 듯 계속 질문을 해대자 지윤이는 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뭐.. ...... 근데 선생님은 어디 계셔..?"
"저쪽으로 가면.. 코끼리 있는데 지나서 큰 새장이 나오거든.. 아까 거기 계셨는데..."
"그래..!"
"응..? 야... 너 준비물도 하나 안 가지고 온 거야..!"
"응.. 저.. 그렇게 됐어... 아.. 그럼 이따가 보자..."
지윤이는 평소에도 말이 많은 미정이에게 붙잡혀 있으면 곤란할 것 같아, 인사를 하고 황급히 빠져나왔다.

미정이는 밝고 성격도 좋은 아이지만 말이 많아 지윤이에게는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지윤이는 세상과 별로 친한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래 성격상으로도 내성적이었고, 또 그동안의 가정 환경으로 더욱 말을 잃어버렸었다.
흔히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그렇듯이, 지윤이 역시 주변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기를 원했다.
물론 지윤이 역시 외견상 친구라는 아이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 아이들도 지윤이가 정말로 마음을 열어놓은 친구들이 아니라, 형식상 어울리는 아이들이었다.
지윤이 스스로도 자신과 같은 성격의 아이가 이른바 왕따를 당하기 쉬운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만은 피하기 위해 택했던 궁여지책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지윤이가 왕따라는 것을 무서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귀찮아했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
이 여자아이에게는 이 왕따라는 것조차도 일종의 관심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지윤이는 친구라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저 말수 적은 친구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했고, 일정 부분 이상 마음을 열지 않고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지윤이는 담임 선생님에게 엄청나게 혼이 났다.
지윤이는 담임 선생님에게 스스로 온 자신의 결정을 금새 후회하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당연히 지각을 한데다가 미술 준비물까지 가져오지 않은 지윤이를 보고 어처구니없어 했다.
"지윤아.. 너.. 어떻게 된 거냐..? 여기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니..?"
지윤이의 집안 사정이며 한 달 전에 있었던 가출을 알고있는 담임 선생님은 처음에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지윤이로서는 어떤 일이 있었다고 대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요.. "
그리고는 어떤 질문을 해도 별로 시원치 않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지윤이의 태도가 담임 선생님을 화나게 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21년 교직의 경험상 짐작컨대 그간 사정은 뻔해 보였고, 오늘 일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 아이에게서 결국 변변한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젠 직장이고 가정이고 만사에 찌든 이 40대 후반의 남자는 또 다시 어린 여학생들의 사춘기 증세와 집안 문제를 자신이 감수해야 하나 생각하니 솔직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 짜증을 자신이 선생이란 이유로 참지 않았다.
참으면 병이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부러 보라는 듯이 속으로 한참 끓는다는 표정을 지은 후에 본격적으로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주변을 지나던 같은 학교 여학생들이나 다른 선생님이 힐끗 힐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지윤이는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져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야단을 맞고 있었다.
그나마 공공장소라 체벌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한참을 야단 친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며 지윤이를 보내주었다.
"지윤이 너.. 친구들한테서 종이랑 미술도구 빌려서 그리고 반드시 제출해.. 준비물 없다고 그냥 갈 생각하지 말고.."
"예..."
"그리고.. 내일 너희 어머님 좀 보시자고 해라.. 요즘에 너 이상한 것 같다.."
"예..."
그러나 지윤이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물러났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저는 내일 학교에 안 갈 테니까요..'
그리고 또한 미술도구를 빌려서 그림을 그려낼 생각도 없었다.
그러려면 친구인 은수나 희진이를 찾아야 하는데, 또 그 아이들한테 늦은 것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솔직히 지윤이는 지금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기분도 아니었다.
지금 여자아이의 기분은 최악이었던 것이다.
아침에는 또다시 엄마와 크게 싸우고 집을 뛰쳐나와 버렸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발견한 것은 막상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자신이었다.
일단 인천의 아빠 집으로 가고 싶지만, 그것도 왠지 주저되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지하철에서의 일도 있었다.
그동안 잊고 싶었고, 또 잊으려 노력한 그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마음으로는 거부하려 해도 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수치스러운 감정..
이런 와중에 담임 선생님에게 아무리 야단을 맞아도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담임 선생님이 단지 남자 선생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설령 여자 선생님이었더라도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욱 야단을 맞게 되자 지윤이는 자신이 몹시도 억울했다.
지윤이는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여자아이의 두 눈가에서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아침에 집을 뛰쳐나오면서 참았던 눈물..
막상 갈 곳이 없어 망설이는 자신의 처지를 느끼며 참았던 눈물..
지하철에서 다급히 내린 뒤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며 참았던 눈물..
그리고 아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담임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으며 속으로 억울한 마음을 참았던 눈물..
이 눈물들이 한꺼번에 지윤이의 하얀 뺨 위로 두 줄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혹시 아이들 중 누가 볼까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쳐내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자꾸만 흘러내리고 있었다.

은수와 희진이는 점심 시간 때 다른 아이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다가 지윤이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정말..!"
"응.. 그렇다니까.. 엄청 지각해 가지고 담탱이한테 깨지는 것 봤는걸.."
"어.. 우리는 오늘 안온 줄 알았는데.."
"그래..? 이상하네.. 담탱이가 너희들한테 도구 빌려서 그림 그려내라고 했는데.."
"담임이 그러랬어..? 그런데 얘는 어디 간 거지..?"
"지윤이.. 그 기집애.. 그냥 그림 안내고 담탱이한테 개기려는 거 아냐..?"
"우와.. 걔도 보기보다 깡있네.."
"에이.. 설마.. "
"설마는.. 지윤이 걔.. 요즘 들어 이상했잖아.. 더 말이 없어지고.."
"그나저나 점심인데.. 도시락은 어디서 먹는 거지..? 혼자 먹고 있나..?"
"그러게... 미안.. 우리들.. 지윤이 찾아볼게.."
"그래.. 그럼.. "
"이따가 보자.."
은수와 희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윤이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지윤이를 찾던 두 아이가 친구를 발견한 것은 외딴 곳에 있는 어느 매점 앞이었다.
지윤이는 어느 여학생과 마주 서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은수가 지윤이를 부르려 할 때였다.
그때 지윤이의 손이 올라가더니 맞은 편의 여학생 뺨을 찰싹하고 때려버린 것이었다.
"지윤아..!"
"아..! 지윤아..."
두 사람은 그만 너무 놀라 동시에 큰소리로 지윤이를 불렀다.
"응..?! 은수야.. 희진아.."
지윤이는 두 사람을 보자 그만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려던 은수와 희진이는 지윤이의 맞은 편 여학생이 같이 고개를 돌리자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뭐야.. 니들이구나..!"
"어.. 미 미애.. 아냐..? 웬일이야..? "
은수가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을 했다.
잠시동안 네 여학생들 사이에는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그러다가 그 미애라는 여학생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는 곧 지윤이를 한번 눈으로 흘겼다.
"칫.. 웬일은 뭐.. 야.. 너.. 있다가 보자..."
그리고는 지윤이의 한쪽 어깨를 툭 건드리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걸어가는 미애의 눈치를 보며 은수가 놀랐다는 듯이 지윤이에게 속삭였다.
"야.. 쟤량 무슨 일 있었니..?"
"아.. 아냐.. 별루... "
"별루는 무슨 별루야... 쟤가 너 전부터 벼르고 있던 거.. 너두 잘 알잖아..? "
희진이가 걱정 반 짜증 반 섞어서 지윤이에게 말했다.
"아 아냐.. 그런 거.. 그냥 좀.. 이젠 괜찮아.. "
지윤이는 좀 거북한 듯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지윤이가 미애를 만난 것은 점심을 먹기 위해 매점에서 빵과 음료를 사고 있을 때였다.
집을 나올 때 도시락을 놓고 나온 지윤이는 솔직히 후회가 되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언가 사먹으려고 했지만, 밥을 사먹으려고 해도 햄버거를 사먹으려고 해도 여기저기 눈에 띄는 같은 학교 여학생들이 신경에 쓰였다.
단지 지윤이의 자격지심일 뿐이었지만, 도시락도 안 싸와서 사먹는 모습을 혹시라도 아는 애의 눈에 띄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은 싫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자신이 아빠의 집으로 간 후에 계속 결석을 하거나 하면, 아이들이 오늘 본 이런 것들을 들먹일지 몰랐다.
그래서 아이들이 별로 없는 외딴 곳의 매점까지 와서 빵과 음료를 산 뒤에 가방에 넣었다.
한적한 곳에 가서 혼자 먹고 싶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재수가 없었는지 매점으로 오는 미애와 마주친 것이었다.
미애는 반에서 지윤이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아이였다.
이전에 지윤이와 사소한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미애는 소위 그쪽으로 소문이 난 아이였는데 다른 반 애들 몇 명과 잘 어울려 다녔고, 그래서 학생부실에도 자주 불려 다녔지만 반 아이들은 은근히 미애에게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미애는 지윤이가 자신이 하는 말을 무시했다며 시비를 걸게 되었다.
평소에도 말없는 지윤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미애는 무슨 말을 해도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는 지윤이의 태도에서 은근히 모욕감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말을 하자면 그때 미애가 느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윤이는 미애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이런 부류의 아이들이 귀찮아서 침묵하는 경우였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때는 별탈 없이 마무리되었고, 지윤이의 친구인 희진이도 좀 노는 편의 아이인지라 지금까지 왕따 같은 일은 없었지만, 이후로 미애는 지윤이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었다.

지윤이는 매점 앞에서 마주 친 미애를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러자 미애가 평소처럼 또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걸었다.
"아까 제대로 깨지더라.. 너.."
아마 지윤이가 담임 선생님에게 혼나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젠장..!'
지윤이는 속으로 생각하며 그냥 무시하고 걸었다.
"야.. 또 생까냐..?"
"............"
"오늘은 마침 혼자네.."
그러다가 문득 지윤이가 매점에 온 이유를 눈치채고는 피식 웃었다.
"뭐야..! 불쌍하게시리.. 빵으로 점심을 때우려고..? 도시락 잊어먹었냐.. 니 친구들은 어디 가고..? 내가 희진이 기집애들한테 이야기해줄까..? 친구 굶고 있는데 밥 좀 나눠주라고..."
순간 지윤이는 우뚝 그 자리에 서버렸다.
그것은 지금 지윤이가 가장 싫은 것들 중에 하나였다.
비록 친구라는 이름으로 어울리고는 있지만, 자신의 우울한 속내까지 함께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미애가 무슨 말을 하든 그냥 무시하고 갈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성격으로 봐서 정말로 아이들에게 이야기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가출한 것을 알면 그때는 또 무슨 소리를 할까?
때문에 지윤이는 고개를 돌리고 미애에게 억지로 입을 떼었다.
"하지마..."
"뭐..?"
"애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그냥 모른 척 해줘.."
"픽.. 내가 왜 니 말을 들어야 하니..?"
미애는 왠지 지윤이의 약점을 하나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비아냥거렸다.
"근데 너 집에서 뭔 일 있었니..?"
"무슨 일.. 이라니..."
"준비물도 안 가져오고.. 지각도 하고.. 도시락도 없고.. 그럼 뭔 일이 아니고 뭐야.. 집에서 쫓겨나기라도 했냐..?"
"알 거 없어.."
"너.. 이런 소문 있더라.. 지난달에 아프다고 결석한 날.. 사실은 가출했던 거라고.. 교무실에서 담임하고 니 엄마 이야기하는 거.. 6반 애가 봤다는데..."
순간 지윤이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아냐.. 그런 거..."
"아니긴 뭐.. 확실히 들었다는데..."
"............"
"근데.. 너 쪼가리라도 생겼나..? 그래서 가출한 거야..?"
"쪼 가 리 라니...?"
"남자 말야..."
'남자'라는 말이 나오자 지윤이는 순간 그 날 일이 생각나 수치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냥 화내라고 내뱉은 말에 지윤이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본 미애는 속으로 놀랐다.
'어머..! 설마..'
그렇게 오해를 한 미애는 곧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라라..! 니 표정 보니 정말인가 보네.. 헤.. 쑥맥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너두 제법이네.. 알았어.. 이 몸이 알아서 소문내 줄게..."
그 소리를 듣고 지윤이는 놀라 당황했다.
"아냐.. 아니라니까.. 그런 게.."
"웃기지 마.. 이 기집애야..."
"정말이야..."
지윤이는 자신이 완전히 수세에 몰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소문내기 싫었던 부모의 이혼 이야기며 인천 아빠 집에 갔었다는 식의 해명이 미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해명은커녕 그런 것들도 어차피 미애에게는 또 다른 약점을 제공해주는 것뿐 일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미애가 다시 내뱉은 비아냥거림이 조용히 지윤이의 귓전에 흘러들었다.
"그래.. 그 치가 밤에 끝내줬니..? 너 이제 아다 아니지..?"
순간 지윤이는 울컥하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반사적으로 미애의 뺨을 때린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은수와 희진이가 자신의 이름을 외쳤을 때였다.
"지윤아..!"
"아..! 지윤아..."
뺨을 맞은 미애도 뜻밖의 전개에 놀라 멍하니 있다가,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칫.. 웬일은 뭐.. 야.. 너.. 있다가 보자..."
상황이 불리함을 느꼈던지 미애가 눈을 흘기면서 남기고 간 말이었다.

"너.. 점심은 먹었니..?"
미애가 사라진 후 은수가 물었다.
"응..?! 그 그래.. 먹었어.."
지윤이는 고픈 배를 참으면서 애써 거짓말을 했다.
"뭐니..? 왔으면 같이 먹어야지.. 혼자서.."
희진이가 뭔가 물만인 듯 투덜거렸다.
"미 미안해.. 사정이 있어서..."
"사정은 무슨 사정인데.. 오늘 늦고.. 더구나 담임이 우리한테 빌려서 그림 그려내라고 했다며..? 그런데 우리한테 아무 말도 없구..."
"저.. 그게..."
"그리고 아까 그건 또 뭐야..? 그게 그냥 넘어갈 일이야..? 너 무슨 일 당할지도 모르는데... "
"미안해..."
"희진아.. 그만해.. 지윤이도 미안하다고 하잖아..."
은수가 희진이를 다독거리면서도 자신도 좀 걱정이 되는지 지윤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윤아.. 사실은 나도 좀 마음에 걸려... 아까 그 일 말야.. "
"............."
"아까.. 왜 그런 거야..? 말하기 힘든 거야..?"
"저기.. 미안해.. 아무 것도 묻지 말아줄래.. 좀 사정이 있어..."
그러자 지윤이가 아직도 불만인 듯 투덜거렸다.
"그게 뭔데.. 우리한테도 말못할 그런 거야..? 너 요즘.. 너무 하지 않니..? 계속.."
"으응.. 너희들에게는 정말 말하기 힘든 거야.. 미 미안해..."
지윤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자, 은수는 내심 걱정이 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니..! 그럼 할 수 없..."
은수가 이야기를 하는데 중간에서 희진이가 말을 끊었다.
"그럼 언제는 뭐 말할 수 있는 게 있었니..?"
".........!"
"넌 매사에 그런 식이었잖아.. 언제 우리한테 마음을 연 적이나 있어..?"
정곡을 찔린 지윤이는 아무 말도 못했다.
"솔직히.. 우리 정말 니 친구 맞어..?"
"희진아..!"
옆에서 은수가 말렸지만, 희진이는 평소 불만이 많았었는지 내친 김에 모두 내뱉고 있었다.
그 소리들을 들으며 지윤이는 귀밑까지 얼굴이 붉어졌다.
'시 싫어.. 이런 것.. 정말 오늘은 왜 이렇지..? 나 왜 이렇지..?'
이런 생각을 하며 여자아이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울컥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은수가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그래.. 사실 나.. 니네들 친구 아냐.."
"뭐..?"
"지윤아..."
"사실은.. 친구로 생각지도 않는데.. 그냥.. 그런 척.. 어울리고 있었을 뿐이야.."
"지윤아.. 지금 무슨 말하는 거야..?"
은수가 당황해하면서 희진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때 갑자기 지윤이가 울먹이면서 외쳤다.
"그러니까... 제발 나 좀 귀찮게 하지 말라고.. 혼자 있고 싶으니까..."
큰 소리에 주변에 지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돌아보았다.
"허.. ........"
"뭐 뭐야.........."
희진이와 은수는 예상치 못한 지윤이의 반응에 황당해했다.
"너..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하니..? 다 너 걱정돼서 하는 말이잖아..."
이윽고 얼굴이 붉어진 희진이가 같이 소리쳤다.
"차 참아.. 희진아.. 지윤이.. 정말 힘든 일 있나봐.. 일단 오늘은 이 정도에서 하고 내일 마저 이야기하자... 응..? "
은수는 희진이를 뜯어말리면서 고개를 돌려 지윤이에게 말했다.
"지윤아.. 무슨 일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은 빨리 집으로 가... 미애 그 기집애가 그렇게 물러나지 않을 테니까.. 분명히 자기네 애들 몰고 돌아올 거야... 그리고.. 집에 가면 꼭 내 휴대폰으로 전화해.. 알았지.."
"그만둬.. 은수야.. 이런 기집애 걱정할 필요 없어.. 나쁜 기집애..."
희진이가 은수의 팔을 뿌리친 뒤,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리며 저만치 걸어가기 시작했다.
"희진아.. 같이 가.. 지윤아.. 전화해.. 꼭..!"
은수는 서둘러 희진이를 따라갔다.
이제 그들이 서있던 자리에는 지윤이만 홀로 서있을 뿐이었다.
"최악이야.. 정말.."
지윤이는 혼자 중얼거렸다.

"하아... 하악..."
지윤이는 얼마나 뛰었는지 몰랐다.
구두 뒤축에 발뒤꿈치가 아려왔다.
벌써 20분 째 미애의 패거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체구가 가냘프고 달리기를 잘 못하는 지윤이로서는 만약에 처음부터 그네들의 눈에 띄었었다면 영락없이 붙잡혔을 것이다.
그나마 지금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은 멀리서 다가오는 그네들을 미리 발견하고 도망을 쳤기 때문이었다.
지윤이는 일단 은수의 충고대로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었다.
담임 선생님에게 일단 보호를 요청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되면 엄마와 연락을 할 것이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일단 이곳에서 피신하려 했었다.
그러나 미애네 패거리들은 미리 대공원 출구 쪽에서 지윤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네들은 모두 8명이었는데 그중 일부는 출구 쪽을 지키고, 나머지는 지윤이를 찾으러 대공원 안을 뒤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윤이는 그네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무조건 열심히 뛰어야 했다.
하지만 좀 전에는 정말 아찔했다.
결국 미애네 패거리들의 눈에 띄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정신 없이 도망치다 급한 김에 들어와 숨은 것이 이 시설물이었다.
무슨 건물인지는 미처 모르겠지만 내부로 통하는 문이 하나 열린 것을 발견한 것이 정말 행운이었다.
지윤이는 재빨리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쓰인 철문을 닫고는 벽 안쪽에 숨을 죽이고 웅크리고 있었다.
밖으로 몇 명이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씨.. 어디로 꺼진 거야... 그 싸가지 없는 년이.. 감히 우릴 뭘로 보고..."
"미애야 혹시 일루 들어간 것 아냐..?"
지윤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급해서 미처 문을 잠그지 못한 것이다.
"여기 함부로 들어가도 괜찮나..?"
"일단 안을 살펴보지 뭐..."
문의 손잡이가 돌아가고 지윤이가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그때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뭐야.. 거긴 출입금지야.."
"아..! 씨.. 젠장.."
"아 저.. 죄송해요.."
"너희들 어느 학교야..?"
여기 직원인 듯 한 남자에게 미애들이 야단맞고 있는 동안, 지윤이는 황급히 안쪽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혹시라도 그네들의 말을 들은 직원이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볼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안에 있는 직원들에게 들킬까봐 살금살금 들어간 지윤이는 다행히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쫓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곳에는 기계실 같은 곳이 있었고, 또 다른 철문이 있었는데 손잡이를 돌려보니 잠겨져 있지 않았다.
지윤이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마도 동물 우리로 들어가는 통로 같았다.
그때 동물 우리 쪽에서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고, 지윤이는 황급히 반대편으로 가 한 창고에 몸을 숨겼다.

그곳은 사람이 없고 조용했으며, 왠지 아늑한 느낌을 주는 구석진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앉아있으면 외부에서는 누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지윤이는 일단 미애네 패거리를 피해야 했고, 또 여기 직원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하여 한동안 숨어있어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윤이는 지금 울적한 마음에 혼자 있고 싶었다.
지금 지윤이는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종이박스를 몇 개 주워와 적당한 곳에 앉을 곳을 만들고 그 위에 쭈그려 앉았다.
처음에는 뭔지 알 수 없는 동물냄새가 밴 이 공간에 좀 비위가 상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좀 지나 익숙해지자 괜찮았다.

이렇게 주변이 안정이 되자, 지윤이는 곧 지금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져서 다시 눈물이 나왔다.
울적한 마음에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이 다 싫었다.
그리고 자신이 상처를 준 친구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미안해.. 희진아.. 은수야...'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어..'
'이젠 정말 아무 것도 싫어...'
"흑.. 흑흑..."
지윤이는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고개를 푹 숙이고는 울기 시작했다.
여자아이의 작은 어깨가 조용히 들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울다가 지쳐 잠이 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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